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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06:00

Ing/I'm 2008/07/07 00:53

 

 
  나는 잠귀가 얕은 편에 속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깼다 잠들기를 반복하고, 잠이 들어도 반쯤 깬 것처럼 몽롱할 때가 많았다. 달리 예민한 성격도 아니었고, 잠자리를 가리는 편은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고요한 방에서 혼자 잠드는 것이 가장 곤욕이라면 곤욕이었다. 서울에 올라와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혼자 생활을 했던 때는 정말 최악에 가까웠다. 깊은 잠에 들지 못해 공중을 떠다니는 것처럼 몽롱해졌다가, 잠에서 깨는 그 순간에 혼자서 맞이하는 어둠과 침묵은 무거운 공포가 되어 나를 짓눌렀다. 나를 으깨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하루 이틀 새에 생긴 습관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해 줄듯이, 다섯 번째 누나가 지나가듯이 내게 말을 해 준 적이 있었다.
  ‘겨우 잠들었다 싶었던 애가 내가 일어나기만 하면 누나, 어디가. 하면서 귀신같이 깨는 거야. 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 빤히 바라보면서 그랬어. 그러다 다시 머리맡에서 바라보고 있으면 다시 잠들고.’
  어렸을 때부터 그랬던 모양이었다. 사실 전혀 기억에 없었지만, 이 말을 전하는 누나는 농담으로 받아칠 수 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아주 오래된 일이었는데도 너무 생생하게 얘기하는 얼굴이 더욱 그랬다. 너무 신기해서, 밤을 새고 바라본 적이 있었는데, 밤새 한 번도 깨지 않고 잘 자더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타인의 입을 통해 듣는 기억에 없는 어린 내가 생소했다. 그러나 그 어린 아이는 부정할 수 없이 지금의 나와 꼭 닮은 모습이기도 했다.
  그때의 나는 무엇이 그렇게 불안해 깊이 잠들 수 없었던 걸까.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어째서 조금도 자라지 못한 채 불안해하고 있는 것일까.
 

 


I'm   

00:06 coward
written by pinkjelly

 

  오랜만에 아주 깊은 잠을 잔 것 같다.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시야 가득 들어차는 것은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얼굴이 왜 코앞에 다가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허겁지겁 안도하기에도 바빴다. 늘 이랬다. 깊은 잠에 들었다 깰 때면 늘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얼굴을 내보이게 된다. 방금까지 무방비하게 늘어져 잠에 빠져 있던 주제에, 그동안 풀어져 있던 경계 태세를 한꺼번에 세우기라도 할 듯이.
  빙빙 도는 머리와, 지독한 갈증은 완연한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할 듯이 맹렬한 기세로 나를 덮친다. 너무도 당연한 아침 풍경에 혼자 잔뜩 겁을 집어먹고 불안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는 나는 얼마나 어울리지 않고, 우스운 모습일까. 불안함이 가신 후의 나는 이렇듯 작고 초라하게 쪼그라든 풍선 같다. 우글쭈글, 방금까지 팽팽히 차올랐던 공기가 한 순간에 푸쉬쉬 빠져나가고 볼품없어진.
  이런 나를 배려하기라도 할 듯이, 내 앞의 작고 동그란 얼굴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작게 벌린 입술 사이로 새근새근 숨소리라도 들릴 것 같은 풍경은 나를 안도하게 만든다. 익숙한 얼굴, 그리고 팔에 느껴지는 기분 좋은 무게감. 온몸에 느껴지는 완연한 숙취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푹 잔 덕분인지 마음만은 가뿐했다.  

 

  “뭐야…”


  부러 불퉁하게 나오는 물음에 대답도 없이 동그랗게 말린 몸을 맞대며 내 등 뒤로 깍지를 끼는 박유천은 꽤 귀여웠다. 스물 넘은 사내놈이 귀여워서 어디에 쓰나 싶지만, 아침부터 살살 부리는 애교는 딱 기분이 좋을 정도니까 패스. 고집스럽게 눈도 뜨지 않은 박유천은 내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뜨끈한 체온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젯밤에는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울더니, 눈 뜨자마자 안겨오는 모양새는 달달하다 못해 애틋하기까지 했다.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걸까. 찬바람이 불면 찬바람이 불어서 슬프고, 달이 뜨면 달이 떠서 슬프다고 했던 박유천이 생각나 잠시 마음 한 켠이 아릿해진다. 기분이 좋을 때야 재잘재잘 말도 잘 하지만, 일단 마음에 무슨 응어리가 지기 시작 하면, 입을 딱 닫고 더 귀엽고, 아련하게 군다는 건 경험상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욱 주의를 해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요즘 별 신경을 쓰지 못한 것 같아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컸다. 막내가 아닌 큰 형으로 산 게 몇 년 째인데, 아직도 세심함과는 거리가 먼 탓이었다.
  어쨌거나 잠이 덜 깬 게 틀림없는 녀석의 몽글몽글한 애교에 꽤나 약한 김재중은 기꺼이 두 팔 가득 녀석을 끌어안았다. 마른 몸이 푹 안겨오자마자, 단단히 끌어안고 그대로 왼쪽으로 몸을 굴렸다.   


  “키킥.”


  데굴데굴, 굴러가는 사이로 박유천의 웃음소리가 퍼진다. 박유천은 울음이 처량 맞은 대신에 웃는 게 누구보다 천진한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한 번 터지면, 계속 웃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딱딱한 바닥을 구르고 있는 몸은 둘 다 형편없이 말라, 뼈가 부딪혀 아픈 것도 같았는데, 눈도 잘 못 뜨고서는 좋다고 샐샐 웃는 얼굴을 보니, 멈출 수가 없다. 스물 넘은 사내놈들이 부둥켜안고 바닥을 굴러다니는 꼴이 조금 우습더라도 괜찮았다. 왼쪽으로 데굴데굴 굴러 구석에 처박힌 몸을, 으쌰 방향을 바꿔 오른쪽으로 구르자 또 말간 웃음이 터진다. 데굴데굴, 꼭 소리라도 날 것처럼 신나게 구르는 우리는 조금은 어이없고, 그보다 조금 더 많이 철딱서니 없어 보이겠지만.
  겨우 다시 제 자리에 돌아오고 나서야, 눈을 떠서 함께 시선을 마주치는데 형편없이 부은 눈가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부어올라 엉망이었다. 어차피 똑같은 상태인 얼굴을 확인하고 배를 잡고 웃는 대신, 닿을 듯이 가까이 있는 이마를 쿵- 들이 받았다. 
  우리 이 얼굴로 지금 뭐 했냐.

 


  
  먼저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은 유천이 손을 뻗어 일으켜 주길래, 얌전한 아이처럼 눈을 감고 따라 일어나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저도 자다 일어나서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일으키려다가 몇 번씩 힘이 죽죽 빠져서, 다시 바닥에 처박히기 일 수였지만, 그나마도 유천이 도와주지 않으면 하루 종일 바닥과 한 마음으로 못 일어날 것 같아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간신히 바닥에 허리를 세우고 앉는데, 온 몸에 삐걱거리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푹 자서 좋은 기분과는 별도로 속은 그렇지 못했다. 아까 구를 때 뒤섞여버렸는지, 뒤죽박죽해진 머릿속과 위는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게다가 어제는 얼마나 마셨던 건지, 생각도 잘 나지 않는 기억의 끝이 희미했다. 술집에서 멈춘 건가, 아니면 차 안에서, 아니면 집에 와서? 어느 것 하나 정확하지 않고 흐리멍텅하게 생각날 듯 말듯 한 기억들에 머리가 쪼개지게 아팠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신나게 자고 있던 곳도 익숙한 제 방이 아닌 거실 한 복판이었다.


  “뭐야, 나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스스로 생각해 봐도 어이없는 질문에 본격적인 힐난의 눈초리가 와서 박히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지 않았는데도 알 수 있었다. 원래 그런 건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몸으로 다 느껴지는 법이었다. 오랜 시간동안 터득한 삶의 경험이랄까. 사실 눈 여섯 개가 쪼르륵 여기를 노려보고 있는 풍경은 제법 무서울 것 같아, 쉽게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들어가서 자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죽어도 거기서 자겠다고 온갖 땡깡을 부린 게 어디 사는 누구시더라.”

  “거…거짓말!”

  “당연히 믿고 싶지 않으시겠지.”


  빈정거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뻔하게도 창민이었다. 밤새 정색하고 맞받아칠 준비라도 하고 잔 건지, 기다렸다는 듯이 속사포처럼 터지려는 이야기에 슬쩍 겁을 먹은 것도 사실이었다. 어제, 뭔가 끔찍한 난동이라도 부린 것일까. 주사는 별로 없는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마도 혼자만의 믿음이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의식하고 있는 한, 으로 한정적이었을지도. 요즘 부쩍 술 마실 일이 많이 있었던 데다가, 필름이 끊기는 일도 드물지 않은 바람에 그 믿음은 끝도 없이 점점 더 흐려졌다.


  “…진짜야?”


  앞에 멍하게 앉아 있던 유천에게 자신 없는 말투로 슬쩍 묻자, 잘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다. 그러고 보니 유천은 꽤나 취한 상태로 창민과 일찍 들어갔다. 주량만큼 마시면 그대로 자는 녀석이니, 일찍 자서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때, 따라가서 같이 잠이나 푹 잘걸.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남아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제를 떠올려가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일까. 새삼 한심하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뭐…. 형님이 술을 좀 드셔서 주정을 부릴 수도 있는 일이지. 뭘 그렇게 눈에 도끼눈을 뜨고 그래!”

  “좀, 좀? 퍽도 좀이었겠다. 어이고 두야.”


  그냥 왜 혼자 거실에서 퍼져 자고 있었는지, 궁금했을 뿐인데. 아주 천하의 주정꾼으로 만들 셈인지 창민의 오버 섞인 목소리가 집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왜, 카메라 앞에서 영웅 재중은 알콜 중독이라고 노래를 불러라, 불러. 저놈의 자식, 순 목소리만 커서. 누가 저렇게 목소리 크게 키워놨는지.
 
  창민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리며 시선을 들자, 눈앞으로 식탁에 고물고물 앉아 있는 남자 셋이 보인다. 예상 외로 등을 보이고 있는 정윤호를 제외하고는 예상대로의 모습이었다. 네 개의 눈동자가 모두 나를 이상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가장 먼저 눈이 마주친 것은 정면에서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던 심창민이었다. 형이 돼서는, 하면서 혀를 차고 있는 것 같은 얼굴에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꽤나 근엄한 얼굴을 해보이던 창민은 뭔가 더 말하려다가, 꾹 집어 삼키더니 이윽고 제 밥그릇으로 시선을 옮긴다. 뭐야, 불안하게. 차라리 아까처럼 나불나불 잔소리라도 하지, 묘하게 집어 삼킨 그 말이 이제야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다. 뭐, 큰 실수라도 했나. 그래봤자 어차피 기억나지 않는 일들일 뿐이다. 또 술 먹고 뽀뽀라도 하자고 그랬나. 가벼운 상상부터 해보기로 한다. 언젠가 기겁하며 제게 이런 술버릇 키울 거면 당장 술 따위는 끊으라고 호통 치던 앳된 창민의 얼굴이 떠올라 혼자 조금 킥킥대며 웃기도 했다. 물론 그럴 군번이 아닌 것을 알아,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작게 웃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면서.
  다음으로 시선이 마주친 것은 그러한 창민의 옆에서 뭔가 불퉁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준수였다. 아직 끊기지 않았던 기억에 의하면, 어제 같이 주거니 받거니 한참 했던 거 같은데, 그래도 멀쩡하게 아침 먹는다고 나와 있는 걸 보니 어제 제대로 진상을 떤 것은 나밖에 없을 것이 분명해졌다. 우리 중에 주량이 제일 약한 김준수도 멀쩡한데, 혼자 이게 웬 망신일까.
  그런데 어쩐지 나를 보는 김준수의 시선이 이상했다. 창민처럼 구박어린 눈으로 나를 보거나, 아니면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는 얼굴과는 달랐다. 나를 보며 잔뜩 찡그리고는 있는데, 약간 얼이 빠진 것 같기도 하고. 혹은 뭔가 원망스러운 것 같기도 하고. 뭐지, 저 복합적인 얼굴은. 분명 나를 향해 있긴 한데, 내게서 조금 비켜있는 걸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시선은,  왜 저렇게 서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까.
  다혈질에다가 단순하긴 하지만 조금 애 같은 구석이 있는 김준수라서, 얼굴을 감추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뭘 생각하는지, 어떤 기분인지 얼굴에 잘도 드러나는 김준수였는데, 지금 나를 보고 있는 저 얼굴은 좀처럼 알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어 나도 모르게 오래 머물게 되는 것이다. 김준수가 이유도 없이 가끔 나를 불퉁하게 바라본다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딱히 그럴 만하게 켕기는 이유도, 의심 가는 바도 없어 가볍게 넘기기 일 수였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다르다. 뭐지, 이 위화감은.
  앞에 멍하니 앉아 있던 유천이 먼저 비칠대며 일어나면서 그 위화감은 더욱 강해졌다. 준수의 눈이 왠지 모르게 순간 와락 흔들린 것 같은 건 내 착각이었을까. 이상한 눈을 하고 있던 준수의 얼굴이 전체적으로 한 번 울컥 흔들린 기분. 뭐지, 숙취로 죽을 지경인 반 취객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절레절레 어지러운 고개를 흔들며 느릿하게 주방으로 향하는 유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제 일찍 들어간 유천인 푹 자고 개운한 상태여야 하는데, 왜인지 모르게 위태로운 등이라 한 번 닿은 시선이 떨어지기가 어려웠다. 넓은 어깨는 평소와 다를 것도 없어 보이는데, 뭔가 위태로웠다. 마치 방금 전 준수의 얼굴처럼.

  밥을 다 먹었는지, 달그락거리며 제 몫의 그릇을 들고 창민이 일어남과 동시에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밥 먹어야지.”
 
  “…생각 없어. 씻을래”      
 
 
  유천에게 밥을 먹기를 권하는 준수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일상적인 모습이 분명했다. 아침이면 유난히도 입맛이 떨어지는 박유천이 거절하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인데, 기분이 묘했다. 꼭 누군가 꽁꽁 숨겨둔, 훔쳐보면 안 되는 것을 보고 만 느낌. 부러 시선을 멀리 두었다. 예를 들면 아직도 고개를 한 번도 돌리지 않은 정윤호의 널따란 등이나, 제 방으로 사라져버리는 창민의 잘생긴 뒤 꼭지 같은 것으로. 다른 데 엄한 시선을 두며 나는 지금의 이 위화감을 묻어버리기 위해 애를 쓴다. 이상하잖아, 그런 건.      


  “아, 왜 코가 아프지?”

 
  혼잣말에 가까운 물음에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차피 무언가 대답을 바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 혼잣말이 되어버리다니. 유천의 위태로운 뒷모습이 욕실 안으로 사라져버린 후의 적막은 생각보다 고요해, 무언가라도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초조함에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편안한 적막이 아닌, 무언가 어색하고 복잡 미묘한 침묵을 참는 것에 굉장히 서툴렀다.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준수의 몸이 약간 움찔한 것 같았지만,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버린 까닭에 확인할 길은 없었다. 손으로 만져본 코끝은 바닥에 세게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살짝 아릿했다. 정말 어제 술 먹고 대자로 엎어지기라도 한 건가. 생각할수록 끔찍한 상상이 부풀려지는 어제는 떠올리기가 괴로워졌다. 그만, 잊자. 잊어. 어차피 내 특기니까.    


  “앉아. 밥 줄게.”


  덜컥 잡힌 손목에 뒤를 돌아보자, 아침 내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정윤호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잘난 등만 계속 보여주고 앉아 있더니, 식탁을 지나치려는 내 손목을 한 번에 잡아챈다. 김준수를 보는 박유천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싫…”

  “먹어.”


  정윤호가 언제부터 이렇게 단호한 남자였더라. 가타부타 잔소리도 없이, 그렇다고 손을 놔주지도 않는 정윤호. 아침부터 신경전을 하기엔 내가 좀 상태가 별론데, 윤호야. 좀 봐주라. 소리 없는 한탄을 하며 표정을 와락 구기는데,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내 몫이 분명한 그릇에 담긴 것은 보기만 해도 시원할 것 같은 해장국이었다. 아침 내 주방에서 풍겨져 나오던 냄새의 주인공이 분명했다. 어제 술을 진탕 마신 이 집 사람들을 위한 음식이라는 건 알겠지만, 이 집에서 저렇게 맛깔스러워 보이는 음식을 할 수 있는 위인은 내가 알기로는 아무도 없었다.

  눈에 익숙한 상표였다. 조금 시선을 돌리자 익숙한 상표가 새겨진 종이봉투가 식탁 위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것이 보였다. 술 먹고 난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생각나고는 하던 집. 얼큰하고 맑은 국물이 맛있다고 몇 번이고 맛있다고 칭찬을 하면서 먹었던 해장국 집의 봉투가, 왜 우리 집 식탁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는 것일까. 족히 차로 삼십분은 가야 있는, 그 집은 배달을 하는 곳도 아니었다. 그리고 술 먹고 난 다음 날 저 집에서 같이 해장국을 먹었던 것은, 지금 내 앞의 정윤호 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어딜 나갔다 왔는지 말끔한 외출복 차림인 정윤호 밖에는.


   “그래, 먹자. 먹어.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곱다더라.”

  “진작 그럴 것이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손목을 놓고 국을 데우기 위해 일어나는 정윤호의 뒷덜미가 쓸쓸했다. 잠기운이라고는 전혀 묻어 있지 않은 그 말끔함이, 손목에 묻어난 담배 냄새가, 나를 허기지게 만들었다.

 

 

  “계속 보고 있을 거야?”

  “혼자 먹으면, 심심하니까.”


  뜨거운 그릇을 맨 손으로 척 집어서 내 앞에 말끔히 놔준 정윤호의 기대와 바람에 보답하고자, 씩씩하게 수저를 들고 국물을 한 수저 떠넘겼다. 한 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전혀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얼굴을 외면하며 나는 허기졌던 사람처럼 밥 먹기에 집중을 한다. 부운 얼굴을 하고 모난 표정으로 식탁에 앉은 나를 위해 네가 데워낸 국물은 메마른 혀에 감기기에는 조금 뜨거웠지만, 나는 식힐 생각도 하지 않고 다시 크게 한 수저, 퍼 올렸다. 그대로 입안에 가득 밀어 넣자, 뜨끈한 국물과 밥알이 까끌한 혀에 여과 없이 와 닿는다. 내가 지금 씹고 있는 것이 해장국인지, 아니면 술인지. 그도 아니면 나를 보고 있는 정윤호의 시선인지. 알 수 없어진 나는 그저 꼭꼭 씹고 또 씹었다. 목구멍을 넘기는 말갛고 알큰한 국물의 맛이 느껴졌다. 예전에 진탕 술을 마시고 정윤호와 마주앉아 퍼 먹던 맛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는 그대로였다.
  변함없이 그대로여서, 어쩐지 목이 멨다.   
   
 
    
 
 

 

  “창민이는 왜 왔어? 지난번에 다 한 거 아니었어?”

  “술이 덜 깬 떼쟁이 형님이 끌고 오는 데 별 수 있나요. 갈수록 떼만 늘어서 큰일이에요.”

  “하하하, 하여튼 누가 형인 줄 모르겠다니까.”
 
  
  진심 반 농담 반, 창민이는 엔지니어 형과 농담 따먹기에 열중을 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버럭 했겠지만, 틀린 말이 없는지라 그저 허허거리며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녁때 촬영 때까지 집에서 빈둥거리며 게임이나 할 생각이었던 창민이 녀석을 억지로 이곳까지 끌고 온 것은 변명할 여지도 없이 내가 맞았으니까.

  지지난주부터 이어져 오던 녹음은 이미 완성이 됐어야 하는 곡이었다. 그런데 하필 녹음 기간 내내 감기로 고생을 하던 녀석과, 유독 이상하게도 잡음이 섞여 들어가 다시 녹음을 해야 하는 내가 문제의 시작이었다. 보기 좋게 늘어져버린 일정이었지만, 오늘은 늦게 보충 촬영만 하면 되는 여유 있는 날이었으므로, 오늘 내로 녹음은 끝내야만 했다. 어떻게 봐도 꼼짝없이 둘이 붙어 움직여야 하는 상황인데도,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기분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싸우지도 않았고, 불편할 만한 일도 없었지만, 묘하게 공기가 답답했다. 밥 한 공기를 다 비울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앉아서 자리를 지키던 정윤호의 우직함이 소화되지 않은 밥알과 함께 명치끝에 걸려 있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창민에게 답싹 달라붙었다. 제 몫의 녹음은 이미 오래 전에 마친 창민은 오늘 하루 여유 있게 집에서 빈둥거리다가 오후 늦게 있는 보충 촬영만 하면 됐다. 그런 녀석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나로서도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지만, 가운데 창민이라도 세워 둬야 숨이라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막내 심창민군은 늘 투덜투덜 불만은 많지만, 그래도 형에게 져줄 줄 아는 미덕을 가진 녀석이었다. 꼭 그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며 녹음을 해야 빨리 끝낼 것 같다는 내 엉터리 호소에도 기다란 몸을 움직여 나갈 준비를 해주었으니까.
 
  피곤하지도 않은지, 녹음실에 도착 하자마자 정윤호는 제가 먼저 하겠다고 나섰다. 마다 할 이유가 없어 그러라며 한 발 물러섰다. 기복이 좀 심한 편인 나와는 달리, 정윤호는 컨디션만 나쁘지 않으면 대부분 세 번 안에 오케이를 받곤 했다. 그게 다 초짜시절 녹음이 조금만 늘어진다 싶으면 불려가서 된통 혼나던 기억 때문에 그렇게 굳어진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녹음은 저만 잘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거였다. 나는 컨디션이 꽝이라 제멋대로 늘어지는 다른 멤버들 몫까지 정윤호가 대표해 혼난다는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면서도, 도움이 되기는커녕 정윤호가 위에 불려가게 만드는 가장 큰 공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윤호는 지금까지 그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정윤호는 어디까지나 제 자신에게만 엄하게 구는 위인이었으니까.   
  그런 종류의 미련함이 보는 사람을 더 심술 나게 한다는 것을 정윤호는 꿈에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조금 비뚤어진 나는 그랬다. 불려나간 정윤호가 구석진 방에서 고개를 숙이고 대책 없이 깨지고 있는 걸 우연히 엿봤던 날부터, 그 장면은 앙금처럼 깊이 가라앉아 나를 오래도록 괴롭혔다.
  저를 열심히 씹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스 안에서 마이크 음량을 조절하며 사운드 체크를 하는 정윤호의 모습에서는 어느새 제법 노련미가 느껴졌다.


  “누구네 리던지, 노래 참 잘하네.”


  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정윤호의 노랫소리에 팔짱까지 끼고, 여유로운 자세로 관망하기 시작한 창민의 입에서 애늙은이 같은 칭찬이 나왔다. 꼭 본인이 듣지 못하는 곳에서만 후한 점수를 주는 창민도 창민이었지만, 내가 듣기에도 정윤호의 오늘 컨디션은 괜찮은 편이었다.


  “3집 가순데 저 정도는 뽑아야지.”


  불퉁하게 내뱉은 목소리가 생각보다 훨씬 더 심술 맞게 느껴져서, 말함과 동시에 내가 먼저 놀랐다. 그걸 놓칠 심창민이 아니지 않은가. 금세 정윤호를 보고 있던 시선이 내게로 향하는 걸 느끼며 나는 촐싹 맞게 놀린 입을 탓했다. 심창민의 마수에 걸려드는 건 정말로 사양하고 싶었다. 
 

  “아유, 그러세요? 역시 3집 가수는 다르시네요. 전날 술을 그렇게 퍼 마셔놓고, 저 정도는 껌이라고 말할 여유도 있고.”

 
  젠장, 심창민.
  필시 어제 일에 대한 앙금이 아직 다 가시지 않은 게 틀림없다. 칼만 안 들었지, 시퍼런 살기가 기세등등한 것이.


  “얼마나 잘 할지 기대하고 있겠어.”

  “그래, 잡아먹어라. 먹어. 삑사리 잔뜩 내서 오늘 촬영까지 다 펑크내보게.”

  “진짜 관록이 무섭긴 하네. 진짜 녹음 늘어져서 다들 발발 떨었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젠 겁나는 게 없지?”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왜, 진짜로 녹음 처음 했을 때. 기억 안나?”


  뜬금없이 옛날 얘기를 툭 던지는 창민이 녀석 덕에 생각이 났다.

 

  늦여름이었다. 때 아닌 늦더위가 난리였는데, 찜통 같은 연습실이나 레슨실이 아닌,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이 녹음실은 우리에게 너무도 낯설었다. 데뷔가 코앞이라는 게 그제야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연습이야 신물 날 정도로 했었지만, 정말 정식으로 녹음하는 건 처음이었던 탓에 우리는 모두 뻣뻣하게 굳어버린 상태였다. 애들 앞에서는 대범한 척 하는 정윤호마저 손과 발이 같이 나가게 하며 걸었을 정도니까. 줄줄이 꿔다 놓은 빗자루처럼 서서,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잘도 터지던 목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꽉 막혀왔고, 다 외운 가사는 저 멀리로 사라진지 오래에, 화음은 제각각 처음 만난 사이처럼 서먹하게 굴다가 흩어지기 일 수였다. 게다가 믿음직스러웠던 김준수마저 장렬하게 대형 삑사리를 내고 구석에 처박혀버리자 우리는 패잔병들처럼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참다못해 터져 나온, 이래서 데뷔를 하겠냐는 뻔한 레파토리부터 시작된 잔소리는 그런 우리를 더욱 바짝 쪼그라들게 하기 충분했다. 한참 그렇게 대책 없이 깨졌을까, 겨우 조금씩 익숙해지는 분위기에 힘입어, 용기 있는 김준수가 다시 도전을 했다. 부스 안에 들어가 심호흡을 하는 김준수를 따라 우리는 또 얼마나 같이 심호흡을 했던가.
  오케이였다. 언제 떨었냐싶게 의젓하게 노래를 부르는 김준수의 주위로 오오라가 펼쳐졌다. 깨끗하게 오케이를 받은 김준수는 승리투수처럼 의기양양하게 부스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우리는 덕분에 쪼그라들었던 자부심에 다시 빵빵하게 공기를 채웠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정윤호에 심창민은 물론이고, 잦은 기침을 하면서도 훌륭히 제 파트를 해낸 박유천까지.

  마침 내가 부스 안에 들어가 있을 때였다. 김준수가 듬직한 어깨를 하고 음료수 봉지를 들고 들어 온 것은.
  언제 나갔다 온 것인지 김준수는 불룩한 음료수 봉지를 들고 생글생글 웃으며 녹음실로 들어왔었다. 붙임성 좋게 엔지니어 형들을 비롯해 사람들에게 음료수를 권하는 김준수는 연습생 짬밥을 공으로 먹은 게 아닌 걸 증명했다. 더운 계절에 가뜩이나 잔뜩 받았던 열을, 차가운 음료수는 훌륭하게 식혀주는 다리를 했다.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 우리에게도 다 돌아가고 남은 봉지의 음료수를 마실 수 있는 휴식 시간이 돌아올 정도였으니까.

  ‘난 이프로, 이프로!’

  부스 안에서 눈치를 보고 있었던 까닭으로 빠른 선택권을 가질 수 없었던 나는 휴식 선언이 떨어지자마자 부시럭거리는 넷 사이로 필사적으로 끼어들었다. 괜찮은 음료수는 분명 앞서 선택권을 가진 이들에게 돌아가고 남은 찌끄러기만 남았을 게 자명해서, 더욱 필사적이었는지도 몰랐다. 호들갑을 떨며 재촉하는 내 이마 위로 차가운 캔이 닿았다.

  ‘안 그래도 챙겼어.’
 
  제 몫의 사이다와 내 몫의 이프로까지 챙겨든 정윤호의 모습이 그렇게 듬직해 보일 수가 없었다. 일일이 얘기하지 않아도 입 안의 혀처럼 구는 다정한 리더를 독식하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달칵- 경쾌하게 딴 음료수에 막 입을 대는데 순간 눈에 들어온 풍경이 있었다.

  김준수. 기세등등하게 녹음을 제일 먼저 끝내 우리의 사기를 올려준 김준수. 게다가 짬밥의 효과로 인해 적절한 타이밍에 음료수까지 돌리는 센스를 보여준 김준수가 꿈지럭거리며 주머니에서 무엇을 꺼내고 있었다. 뭘까. 이미 단숨에 음료수를 반이나 비운 나는 조용히 눈여겨보고 있었는데, 의외로 김준수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커피였다. 게다가 작달만한 손으로 놓칠 뻔하는 것을 간신히 쥐는 것을 보니 뜨끈뜨끈한 캔인 듯 했다. 이 더운 날씨에 웬 뜨거운 커피? 의아해 하는 내 시선도 눈치 채지 못한 김준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캔을 따더니 그것을 스윽 하고 누군가에게로 내밀었다. 나는 그제야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음료수를 받아들지 못한 것이 유천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유천이는 준수가 내민 음료수를 받아 들고 있었다. 뜨거운 것을 그제야 알아차렸는지, 커피를 건네받다가 준수와 손이 마주친 순간 움찔하는 것을 나는 분명 보았었다.

  ‘김준수, 너!! 다 봤어!’

  대뜸 소리부터 지른 내 덕에 화들짝 놀라 커진 눈으로 준수가 나를 봤다. 그덕에 커피를 받아 든 유천의 시선까지 고스란히 내게 와 박혔는데, 나는 정의의 용사라도 된 것처럼 얼른 박유천을 내 주위로 끌어당기며 목청을 높였다.

  ‘넌 진짜 초딩도 아니고, 왜 자꾸 애를 괴롭혀!’

  ‘내, 내가 뭐, 뭘!!!!’

  ‘이거 봐. 이 날씨에 무슨 뜨거운 커피를 주고 그래. 너 박유천 괴롭히려고 일부러 이거 사왔지?’

  빼도 박도 못하게 내가 봤으니, 천하의 김준수라도 어쩔 것이냐. 졸지에 가련한 괴롭힘을 받아 온 녀석이 된 박유천은 내 품에서 보호를 받는 신세가 되었고, 수세에 몰린 김준수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명백한 증거가 있잖아. 증거가. 박유천이 쥐고 있는 커피를 가리키며 내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치자, 뭔가 잔뜩 억울한 얼굴을 한 김준수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었다. 정말 펄쩍.

  ‘넌 꼭 유천이를 그렇게 못살게 굴더라. 이 삐쩍 마른 걸 자꾸 괴롭히면 좋냐? 좋아?’

  말문이 턱 막히는 지 시뻘게진 얼굴로 뒷목을 부여잡는 김준수의 반응이 생각보다 재미있는 바람에 난 신이 났었다. 그런 재미있는 구경거리를 놓칠 위인들이 아닌 정윤호와 심창민까지 가세해 한마디씩 거들자, 김준수는 정말 더 시뻘게질 수 없는 것 같은 데도 자꾸만 벌겋게 달아올랐다. 저러다 폭발이라도 하면 어쩌지, 걱정될 정도로.

  ‘내가 마시면 되잖아, 내가!’

  기어이 성질을 못 참은 김준수가 박유천의 손에서 커피 캔을 낚아채 마실 때, 우리는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었다. 놀리는 보람이 있기도 하지. 박유천은 그러나 순식간에 비어버린 제 손에 어리둥절한 얼굴로, 막 음료수를 입에 들이 붓고 있는 김준수의 팔을 잡았다. 거기 있던 누가 알았을까. 그 손길 하나에 폭탄처럼 터져버린 것이 김준수의 얼굴이 아니라, 김준수의 입 안 가득했던 커피일거라는 것을.

 

 

  “그때, 가관이었지. 아주.”

  “가관이기만 했게? 난 그날 정말 평생 먹을 욕 다 먹는 줄 알았다.”


  창민과 동시에 떠올릴 수밖에 없는, 그날의 아비규환을 떠올리려니 골이 지끈하고 울렸다.

  박유천이 팔을 붙잡자마자, 무슨 스위치라도 누른 것처럼 김준수의 입에서 커피가 풉-하고 뿜어져 나와 버렸다. 그건 아마 박유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음이 틀림없었지만, 더욱 큰 문제는 김준수의 입에서 거세게 뿜어져 나온 커피가 이름도 다 못 외운 장비들 위로 뿜어져버렸다는 사실이었다.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다 타버리고, 남은 것은 벼락같은 호통이 당연했다.
  입가에 잔뜩 커피가 묻은 채로 망연자실한 김준수도 김준수 거니와, 괜히 스위치가 되어버린 박유천도 박유천이었으며, 또 우리는 그날 얼마나 한 세트가 되어 깨져야 했던가.  
   
 
  “김준수 그 자식은 그때부터 턱받이가 필요했어.”

  “애초에 건드리길 왜 건드려. 원인 제공은 형이었잖아.”

  “그러게 그 더운 날 왜 애한테 뜨거운 커피를 사다주고 난리냐고.”


  본의 아니게 사태의 주범으로 몰려, 정작 사고를 친 김준수 만큼이나 혼나야 했던 내게는 꽤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벌써 몇 년이나 된 일이었지만, 그때의 그 억울함은 아직도 생생했다. 게다가 순서도 맨 꼴찌로 돌리는 바람에 다 돌아간 녹음실에서 눈치를 받아가며 마지막으로 녹음을 끝냈던 것도 나였다. 불 꺼진 녹음실의 황량함을 절절하게 느끼며, 분수처럼 시원하게 커피를 뿜은 김준수를, 아니 애초에 어울리지도 않는 뜨거운 커피를 사 와서 빌미를 제공한 김준수를 얼마나 원망했던가.
  새삼 생각나는 억울함에 잔뜩 눈을 치켜뜨는데, 마침 부스 안에 서 있던 정윤호와 눈이 마주쳤다. 두 번 만에 오케이를 받은 정윤호는 합격. 이제 내 차례였다.


  “그거 모르지?”


  부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일어서는 나를 붙든 건 창민이었다. 뭔가 비밀 얘기라도 할 듯이 한 톤 낮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그득했는데, 그런 목소리에 불안해지면서도 궁금증이 치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뭔데, 하며 슬며시 묻자 예의 그 잘생긴 입가를 씨익 쪼개며 웃는 얼굴이 꽤나 수상쩍었다.


  “그때, 유천이 형. 감기 걸렸었다.”

  “?”

  “뭐 어른들의 얘기지.”

 
    그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창민에게 되물으려는데, 내 차례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궁금했던 것은 더 묻지도 못한 채, 시원찮은 대답과 함께 일어서야만 했다. 언제 왔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는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 정윤호에, 방금 전까지 신나게 이야기 했던 열여덟의 우리가 떠올랐다, 금세 사라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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